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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 윤항중 수필가, 희망의 음악편지
김태정 기자 | 승인 2022.09.17 17:27
   
▲ 월산 윤항중 수필가.

길고 험한 항해로 비유되는 인생의 여정을 가노라면 폭풍우나 암초와 같이 자신의 의지나 행위와는 무관하게 예기치 못한 난관과 시련을 겪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소극적이거나 나약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자기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고 힘이 있으며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깊이 자각하고, 용기와 신념으로 대처해 나가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가 약하고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 원하는 바를 이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법이다. 
시련과 역경이 닥친다고 해서 절망과 패배를 의식하게 되면 결국 인생의 낙오자가 되고 만다. 스스로 약하다고 믿지 않는 한 누구도 절대 약한 사람은 아닌 것이다.

내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된 후 집에서 열흘간의 위로휴가를 보내고 있던 때의 일이다. 
평소의 습관대로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형님이 운영하던 약국의 문을 열어 놓고 때마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희망의 음악편지’ 프로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출입문이 살며시 열리는가 싶더니 웬 여인이 얼굴을 보이며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다급한 목소리로 “쎄코날 있어요?” 하고 쫓기듯이 물었다. 

나는 속으로 ‘이 이른 아침에 쎄코날을 찾다니’ 하고 생각하며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네, 있습니다. 얼마나 드릴까요?”하며 극약 보관함에서 꺼낸 쎄코날 병을 아가씨의 코밑에 들이밀고 아가씨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폈다. 

왜냐하면 ‘쎄코날’은 수술환자의 수면용으로 과다복용 시엔 치사 위험이 있고, 일부 사람들이 음독자살용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통상 세 알 이상은 판매하지 않는 약이기 때문이었다. 

얼핏 보아 여인은 미인은 아니었으나, 어쩐 일인지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고무신을 신은 채 코트를 걸친 모습이 아무래도 석연치 않아 보였다.

“얼마나 파실 수 있어요?”

“이걸 다라도 드리죠. 전부 100알입니다만 이게 다 필요하신 건 아니겠죠?”

“어머나! 다른 약국에선 세 알씩밖에 안 팔던 데요?”

(옳거니 당신 나한테 딱 걸렸어!)

“그래요? 그럴 리가 있나요? 혹시 딴 생각할까 봐 그러는가 보죠? 하지만 우리 약국에선 아가씨가 미인이시니까 믿고 달라는 대로 다 드리죠.”

“정말이에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여인이 되물었다. 나는 딴전 부리듯 말했다.

“아가씨! 이건 달라는 대로 다 드릴 테니 걱정 마시고 우리 이른 아침에 청춘남녀가 서로 만났으니 잠시 음악 감상이나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침 금성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는 Brenda Lee 가 부른 ‘If you love me'(사랑의 찬가로 번안되었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음독을 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럴 작정으로 이 약국, 저 약국에서 쎄코날을 사 모으고 있었으리라.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을 건넸다.

“우리 함께 곡명을 한번 알아맞혀 보시죠.”

그때의 분위기가 그럴듯했던지 여인도 어느새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볼륨을 줄이며 내가 물었다.

“어디, 곡명이 생각나셨습니까?”

“저어! 혹시 카니 후란시스 아닌가요?”

“카니 후란시스를 좋아하시나 보죠? 잘 생각이 안 나시는가 보군요. 이 노래는 Brenda Lee가 부른 ‘If you love me'란 곡인데 우리말로 ‘사랑의 찬가’라고 번역이 된 것 같더군요.”

그녀를 보는 순간 무언가 ‘음독자살’에의 유혹을 물리치고 ‘생’에의 의지를 불어넣어 주어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이랄까? 어쩌면 소명의식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치 그녀에게 뜨거운 애정을 호소하듯이 열띤 어조로 가사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물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계속해서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시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차츰 마음을 터놓고 이어진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서 내 생각이 정확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에 털어놓은 그녀의 사정은 다음과 같았다. 양친 슬하에 8남매의 맏이였던 그녀는 E대 독문과 1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부친의 실직으로 등록금 1만 3,600원의 조달이 막연해 자살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나처럼 임자 없이 외로운 총각에게 상의 한마디 없이 그래도 되는 건가”하고 호되게 몰아붙였다.

그리고 그렇게 무모한 결심을 포기하라는 나의 설득이 효과가 있었던지 코트 주머니에서 ‘쎄코날’ 열일곱 알, 스리나 (수면제) 서른 알을 내어 놓으며 흐느껴 우는 것이 아닌가?

좀 더 진지하게 그녀와의 대화가 이어질 뻔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갑자기 “세째 오빠 밥 먹으래.”라고 하는 막내 여동생의무단침입으로 황급히 우리들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 났었다.

그 일이 있은 뒤 한 달 이상을 나는 열심히 일간지의 휴지통 란 등을 살펴봤으나 ‘여대생 음독자살’ 사건 기사가 발견되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지금도 Brenda Lee 가 부른 ‘If you love me'란 노래가 들릴 때면 불현듯 그때의 일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생의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었던 나의 행동에 보람과 기쁨을 느끼며 마치 내가 작은 영웅이라도 되었던 듯 엉뚱한 감회에 사로잡히곤 한다. 

김태정 기자  tvyonhap@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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